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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홍신당의/기도생활

죽음은 눈물 바다로 만들었다, 백성들에게 사랑 받은 정치인 <유명악>

by 진홍 2024. 4.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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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달성군에 위치한 유명악 비각

 

조선 숙종 시절에는 수 많은 이야기들이 전해 진다.

그리고 훗날 현대사회 사극 드라마로 각색되어 탄생되기도 하고,

아들 영조-손자 사도세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기억한다.

숙종과 아들 영조는

긴 명을 가지고 명색이 강한 왕들이었다.

우리나라 정치에 있어 환란을 막기 위해 강하게 대응했다.

그 정치 안에는 올곧은 선비들이 태어 난다.

운명처럼

기도 가는 길,

숙종 시절에 민심을 울렸던

<유명학>에 대한 공덕비를 발견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발췌


유철(兪㯙)의 아들 유명학은

일찍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김창흡에게 학문을 배운다.


송시열(宋時烈)을 존경하던 그는

1689년 송시열이 제주도로 유배 되었다는 것을 알고

상소를 올리면서 관직에 관심을 갖는다.

 

 

 

숙종시절 사마시에서 생원 3등으로 합격하고,

의금부도사•청주목사•대구판관 등 역임한다.

그는 다음과 말했다고 한다.
- 선비는 진실로 남을 사랑하는데 뜻을 두니,

한 목숨도 오히려 도울 바가 있다.

(중략)

공경들은 대체로 법을 지켜

백성을 잘 다스리는 것에 따라 나아가고

혹은 고을로부터 조정에 나아 간다.

 

<행상行喪하는 모양> 19세기 말

 


그는 대구 관아에서 숨을 거둔다.

온 세상 사람들이 슬피 울며 애도했다고 한다.
인사관리들도 통곡하고,

관이 올려진 수레가 이동할 때는

수 백명이 따라 나왔다고 한다.

 

 

유명악 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발췌


대구 백성들 경우

수 백, 만 리까지도 애도를 표했다고 한다.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백성들은 대구의 33곳에 그의 업적비를 세웠는데

그중 8곳의 비를 모아 비각을 세운다.

바로 이곳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이다.

 


살아 생전 유명악은,
노인들에게는 잔치를 베풀고,

궁핍한 백성들에게는 곡식을 나누어 줬다.

아침저녁으로 공문을 열어

백성들을 편히 받아 주었기에

제 집처럼 찾아와 하소연을 할 수 있었다.

 

김윤보의 형정도첩(刑政圖帖)

 

세금을 적게 거두고,

송사 재판이 있는 날에는

신속하게 법에 따라 결판을 내주며

손익을 따지지 않았다.

석빙고를 지어야 할 적에도

백성들에게 세금을 거두지 않고

몰래 관아에서 해결하고 알리지 않았다.

 

단원 김홍도 작품

 

 

크고 작은 일 가리지 않았으며,

고을 아이들의 교육에도 관심을 두고 권장했다.

 

소중히 백성을 대하던 그는

집안에서도 같았다.

누이의 사정도 돌보고,

고아가 된 조카들을 보살피고,

친인척도 챙겼다.

얼굴을 잘 모르는 사이라도

수의라도 보내며 애도하였다고 한다.

 

사군자도. 표암 강세황(1713-1791)

 

 

항상 청렴하고 결백하며 지냈지만

자신의 명성이 드러나는 것을 꺼려했다.

식견과 사려는 깊고

뜻은 확고하며

지조있던 분이었다고 전해진다.

 

유명악 아들 유척기(兪拓基. 1691년-1767년) 조선 후기 문신


그의 모습을 보고 자란 아들 유척기(兪拓基)는

영의정을 지낸 것으로 알려 진다.

 

그의 업적을 보면서 뭉클했다.

얼마나 따뜻한 분이셨길래

흉년이 들었던 시절에 백성들이

다같이 대구 곳곳마다

그를 기리는 공덕비를 세웠을까.

감히 헤아릴 수 없었다.

기도 길 아침 발길에 이끌려

인사 드릴 수 있어 영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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